손상웅의 선교역사 칼럼

한국 최초의 해외선교사 홍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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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호랑이 작성일22-01-17 21:12 조회1,1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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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하는 1863년 경기도 남양군 영흥도에서 출생하였고, 한학을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아펜젤러와 교분을 가졌던 그는 용동교회(내리교회) 담임목사였던 죠지 존스 목사에게서 1901년 3월 세례를 받은 후 고향 남양에 내려가 열성으로 전도하였다.

홍승하가 펼친 전도의 열심이 인정되어 1901년 남양교회의 최초 속장이 되었다. 특히 홍승하는 그의 동생 홍승문과 더불어 축사와 신유의 은사를 통해 영흥과 선감도까지 전도의 불길을 일으켰는데 신학월보 1901년 10월호에는 그의 결실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남양 속장 홍승하가 전도하여 교회 일을 힘써 보시는 데 일 년 동안 일곱 교회를 일으키시나니 남양읍, 양철이, 포막, 매화동, 용두, 영흥섬, 선감섬이다. 그 외의 여러 섬과 촌은 일일이 셀 수 없으니 일곱 교회는 특별히 큰 교회가 될 여망이 있더라.” 1901년 말 홍승하가 최초의 권사가 되는데 누구도 의의를 달지 않았다.

아펜젤러가 세운 한국 최초의 기독교지도자 양성소인 신학회 산하에 개설된 1년 과정의 권사와 지방전도사반에서 아펜젤러와 존스 등의 강의를 들으면서 1902년 5월에 졸업한 홍승하는 그 달 10일에 새로 발족한 남양 구역 7개 지역교회의 전도사로 파송받았다.

1903년 8월 죠지 존스 목사가 담임하는 내리교회는 하와이로 간 농업이주민촌에 홍승하를 해외선교사로 파송했다. 이로써 홍승하는 감리교회의 최초 해외선교사이면서 한국의 최초 해외선교사가 되는 영예를 얻었다.

내리교회 담임목사였던 죠지 존스가 조선의 유능한 젊은이들은 미국에 가서 세계를 바라보며 일해야 하고, 특히 교육을 위해서도 이민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했더니 1902년 12월 22일 첫 이민단 121명 중 절반가량이 내리교회 교인이었다. 이러한 이유만이라도 존스선교사가 그의 제자인 홍승하를 선교사로 파송한 이유로 충분하다.

홍승하는 이교담, 우병길(후에 윤병구), 안정수, 박윤섭 등과 함께 1903년 8월 7일 한인사회의 단결과 독립운동을 위하여 신민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 받았고, 인천 내리 교회 권사이며 이민 첫배의 통역이었던 안정수와 개성 남부 교회 교인이었다가 인천으로 이사한 우병길이 미국 감리교의 피어슨 감리사와 의논하여 1903년 11월 3일 호놀룰루에서 한인감리교 선교회를 조직하였는데, 그 달 10일에 홍승하전도사의 인도로 20여명이 모여 호노룰루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현 하와이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의 모태가 되고 있었다.

홍승하는 1904년 5월부터 우병길, 이교담, 임형주 등을 여러 사탕수수 농장으로 보내 한인을 위로하고 전도하고 예배를 드리는 등 선교 활동을 펼쳐 1904년 말에는 14개의 한인교회를 개척하고 총 한인교인 수는 402명에 이르렀다. 1905년에 와서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가 산하 한인 교인 수가 605명으로 하와이 한인 총수의 삼분지 일에 해당하고, 하와이 전체 감리교인 945명 중 64%를 차지했다. 특히 교회는 한인들에게 이국생활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정착, 취업, 교육 등의 정보교환의 장으로 활용되었으니 많은 한인들이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받아들일 만하였는데 한인교회는 한인공동체뿐만 아니라, 하와이 지역 감리교회 내 여러 행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1904년 11월에는 포화한인교보라는 월간 교회소식지를 등사판으로 발간하여 각 농장에 흩어져 농사를 짓는 한인 동포들에게 배포하여 한인의 교제를 돕고 영적 위로에 박차를 가했다. 1905년 4월 1일부터 ‘한인감리교전도회’가 ‘한인감리교회’로 승격되었고, 한푼 두푼 모아온 300달러와 한인의 믿음에 감탄한 농장주가 헌금한 1천 달러를 합쳐 1905년 7월 9일 예배당을 설립하였다.

예배당 건축의 기쁨이 사라지기도 전에 1905년 7월 홍승하는 건강이 악화로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의 후임으로 감리교 신학교 1회 졸업생인 민찬호 목사가 부임함으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귀국한 지 3개월 후에 제물포 회의에서 찍은 사진에는 홍승하가 외국을 갔다온 사람답게 8명의 다른 한인들과는 달리 양복을 입고 있었으나 금주와 금연에 앞장섰던 철저한 신앙인이었다. 아내를 잃는 슬픔 가운데서도 홍승하는 강화와 인천 지역에서 복음사역에 투신하였고, 특히 남양에 6칸짜리 새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그가 1907년 집사목사가 됐을 때 1908년까지 남양구역의 초대 순회목회자와 공주지방 최초 순회목회자로 교회를 섬겼다.

1912년 장로목사가 된 홍승하는 수원지방 순회목사가 되어 수원종로교회는 류홍준 전도사에게 맡기고 수원지역 중앙의 4구역을 맡아 순회하며 신앙을 지도하였다. 1913년에는 미국 알테라 밥콕스 디터부인이 자기 모친을 위하여 기념예배당을 지으라고 헌금한 미화 150불(300원)과 기존 예배당에서 나온 초가재목을 판 값과 교인들이 헌금한 돈 등 900여 원으로 함석제 40평의 예배당을 천주교인들이 순교한 터에 건축하였는데 건축 후 교인이 두 배가 되었고, 1914년에는 기와집 40평의 삼일여학교를 건축하였더니 학생이 두 배로 증가했다.

1918년에 55세의 홍승하는 하나님의 부름으로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다. 

(기독일보, 2008.12.11. 손상웅의 선교칼럼, 한국 최초해외선교사 홍승하에서 따옮)